내가 어디까지 했더라? -2

아곤
5 min readNov 3,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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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도 이 방을 좋아한 적이 없었다. 자살을 할만큼 싫어했던 건 아니지만 바닥에 깔린 카펫의 근지러움은 도저히 참기 힘든 수준이었으니까. 카펫의 먼지는 알레르기를 일으켰고 찌들고 얼룩진 폴리에스테르 카펫에서 나온 모든 물질은 충분히 유해했다

폴리에스테르 카펫

이 놈의 냄새. 무언가 상한 것이 섞여있음에 분명한 악취는 숨을 턱턱 막히게 했다. 매일 열심히 닦아내려 했지만 도저히 지워지지 않는 얼룩 자욱이며 치워도 치워도 어지러운 방. 매일 환기를 시키고 청소기를 돌렸지만 단 한 버도 이 방이 정돈되어 있다는 인상을 받을 수 없었다.

어쩌면 방의 흔적들 때문에 실제로 더러운 것보다 내 자신이 더 더럽다고 느꼈던 걸지도 모르겠다. 이 방에는 나의 방이라는 자욱이 너무나 많이 새겨져 있다. 황량하고 외로운 밤, 비루하게 취해버린 몸을 끌어 침대에 누우면 다음 날 아침이 오지 않기만을 바랬다. 어쩌면 이런 비참한 기억이 여기 이 침대가 나의 침대라고 소리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따지고 보면 침대는 침대일 뿐인데. 이제 내가 가고나면 여기 남은 나무 토막이 나의 것이라고 그 누가 말해줄까? 정말 나는 어쩔 수 없이 이기주의적인데다 나르시즘을 앓고 있나보다. 이 방을 나의 방이라고 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걸 보니 말이다.

하지만 이제 이 모든 자기 혐오와 자기애의 굴레를 끊어 버릴 기회가 왔다. 바로 죽음으로. 아니, 이 때까지만 해도 이게 그렇게 믿었다.

바닥을 보고 있었다.

신체적인 출력이 꺼지고 있었기 때문에 본다는게 최대한 눈알을 굴리는 정도에 그쳤다. 그러다 시선이 피에 흠뻑 젖어서 바닥에 흩뿌려진 종이 쪼가리에 머물렀다. 그건 나의 유서였다. 아마 책상에 머리에 부딪힐 때 바닥으로 떨어진 모양이었다.

‘사람들이 저걸 읽기는 힘들겠네'

하지만 그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머니와 다른 이들에게 몇 가지 지시 사항을 적어놨을 뿐이었으니까. 학기 중 부득이한 사유로 인한 등록금 반환 절차라던지 하는 것들 말이다. 이걸 쓸 때만해도 몇 자라도 뭔가를 적어두는게 필요할 것 같았다. 행정실에 가서 등록금 반환 절차에 대해 물어보고 안심해서 총을 사러 갈 때까지만 해도 말이다. 그래도 뭔가 쓸만한 걸 어머니에게 남기고 싶었다. 돈은 누구에게나 쓸모가 있으니까. 물론 그걸 유용하게 쓰실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 그리고 유서에는 자살로 인해 임대차 법을 위반한 것에 대해 집주인과 룸메이트에게 사과하는 내용도 담겨 있었다. 계약서 상에 자살은 명백한 위반 사항으로 명시되어 있었다. 기물 파손이나 불법적인 약물 남용과 더불어 중요한특수 계약 위반 사항이었다. 따라서 자살은 추후 보증금 반환에 중대한 결격 사유가 될 소지가 있었다. 그래서 집주인에게 최대한 공손한 어투로 부득이한 사고로 인한 재산 피해에 대해 심심한 사과를 전하면서 청소 비용을 포함한 일체 부대 비용을 정산하고 남는 금액은 어머님의 계좌로 송금할 수 있는지 포함시켜 둔 것이다.

이제와서 솔직히 말하자면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기는 하다. 생각해보면 이걸 쓰는 와중에도 이따위로 휘갈긴 문구에 과연 누가 관심이나 가질까하는 의구심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니 조심조심해서 책상을 피하는 센스를 발휘하는 대신 우악스럽게 머리로 핀볼을 쳐버리지 않았을까? 아니면 상황이 바뀌어서 마음이 지맘대로 바뀌고 있는 걸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몸은 가만히 있는데 마음은 이리저리 잘도 움직이나보다

천천히 의식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자살을 결심 했을 때는 죽음에 들어서기 전에 좀 더 고통을 느끼지 않을까 상상했다. 그런데 이제보니 말끔한 총상은 고통스럽지가 않았다. 어찌보면 말이 될 것도 같은게 칼로 사람을 베는 것은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만큼 고통스럽지 않다. 베는 순간 칼이 너무 빠르게 움직였다면 마찰열로 인해 피부가 약간 타들어가는 느낌이 날테고 타는 느낌은 고통을 준다. 하지만 베이는 것 자체는 그리 아프지 않다. 다만 죽을 때까지 철철철 피가 흐르겠지만.

사실상 종이에 베인 것이 칼에 베인 것보다 고통이 더 심하다. 종이에 베인 상처는 균일하지 않다. 엄밀히 말하자면 종이에 베인 건 베인게 아니다. 부위가 찢겨진 종이 쪼가리마냥 뜯겨진 것일 뿐이다. 같은 이유로 물린 상처 역시 베인 상처가 아니기 때문에 훨씬 더 큰 고통을 수반한다. 다시 말해 일정한 운동으로 베여서 생긴 완벽한 분리는 고통이 덜하다. 종이에 베인 것처럼 불완전하게 분할되어 떨어져나간 상흔이 고통이 훨씬 더 심한 것이다. 전자의 경우 분리는 두 개의 독립된 개체를 생성한다. 둘은 서로와 구별된 별도의 객체로 존재한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는 불완전한 분할로 인해 서로 분리되지도 합치되지도 않은 상태를 야기한다. 고통은 연결됨에서 온다.

총알의 경우를 살펴보자면 아름다울 정도로 균일하고 신속한 운동 작용으로 의식에게 고통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나는 절대로 소크라테스를 이해하지 못하겠네.’

고통과 쾌락이 함께 오는 것이라면 고통의 상실은 쾌락의 상실을 의미할터이다. 논지를 확장하자면 나의 자살은 나에게 고통을 허락할만큼 자애롭지 않았기에 그 어떤 즐거움도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 자살은 실패였던 것일까?

생각에 생각으로 잠시나마 유희를 즐길 수도 있었겠지만 더 이상 농짓거리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쉬고 싶었다. 생각을 거두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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