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리클레스

1. 배경

“그것은 헬라스인들뿐 아니라 일부 헬라스인들에게도, 아니 전 인류에게 일대 사변이었다.” — 투퀴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서문(1-2)

페르시아 전쟁이 승리로 끝난 후 펠로폰네소스 반도에는 다시 한번 전운이 감돌기 시작합니다. 재빠른 함선으로 해상권을 장악한 아테네와 중무장보병으로 육지를 장악한 라케도니아(스파르타)의 충돌이 예견되어 있었으니까요. 페르시아라는 외부의 강적을 상대할 때 둘은 동맹으로서 함께했지만 적이 사라지고 1인자의 자리를 두고 패권을 다투는 상황에서 전쟁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어 있었죠.

페리클레스의 동상은 항상 투구를 쓰고 있는데 이는 그의 긴 머리를 감추기 위한 배려였다고 합니다

페리클레스는 페르시아 전쟁과 펠로폰네소스 전쟁 초기 사이에 아테네를 통치한 인물이었습니다. 40년동안 아테네를 위해 일하는 동안 그는전쟁의 승리 뿐 아니라 문화와 예술 그리고 도시 공공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페리클래스의 시대를 아테네의 황금기로 여깁니다.

2. 성장

“늙은 크로노스는 유명한 폭군을 낳았으니
올림포스의 신들은 그를 운명을 좌우하는 머리라고 불렀다.

— 플루타르코스, 페리클레스

페리클레스의 어머니는 태몽으로 사자를 낳는 꿈을 꿨다고 합니다

페리클레스는 아테네 최고의 명문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크산티포스는 페르시아 전쟁 영웅이었고 어머니인 아가리스테는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 자주 등장하는 네스터의 자손, 알크마이오니다이의 집안 출신이었으니까요.

페리클레스에게는 3명의 스승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궤변가이자 독재 정치의 옹호자로 알려진 디몬에게서 음악과 정치술을 배웠고 파르메니데스의 제자이자 “제논의 역설"로 유명한 제논으로부터 철학을 그리고 아낙사고라스로부터 천체 현상과 자연의 원리를 배웠습니다. 그는 뛰어난 웅변가로 유명했는데 그 원동력에는 그가 받았던 교육이 있지 않을까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3. 아테네의 1인자

“그는 부자들과 대립함으로써 귀족 출신인 자신의 약점을 극복하고 전제적 권력을 노린다는 의심을 억제할 수 있었으며 가난한 자들의 편에 서서, 귀족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기몬과 대항하기위 해 강한 세력을 키웠던 것이다.”
— 플루타르코스, 페리클레스

예나 지금이나 정치는 가난한 사람 vs 부자의 구도를 가지고 있나 봅니다

페리클레스가 정계에 진출할 당시 아테네는 귀족 세력의 지지를 받는 키몬이 1인자로 등극해 있었습니다. 그는 키몬에 맞서 민심을 자기 편으로 돌리기 위해 정부의 돈을 평민에게 나누어주는 정책을 펼쳤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연주회나 축제를 개최하여 사람들을 즐겁게 만들고 도시 건설 프로젝트를 통해 기술자와 인부에게 임금을 나눠주었죠. 그렇게 대중당의 지지를 받은 페리클레스는 키몬이 스파르타와의 내통 혐의로 추방된 후 자연스럽게 아테네 정계의 1인자로 등극하게 됩니다.

하지만 반대파인 귀족파의 반격은 매서웠습니다. 키몬이 죽은 후 귀족파는 키몬의 친적인 투퀴디데스(역사가 투퀴디데스와는 다른 사람입니다)를 리더로 삼고 페리클레스에 대적했으니까요. 그들은 페리클레스가 공적인 자금을 낭비하고 있다고 비난했고 자금의 출처와 흐름을 공개하라고 압박했죠. 그렇지만 실제로 페리클레스는 자신의 개인 돈까지 써가면서 대공사를 진행했다고 합니다. 페리클레스의 민중파와 투퀴디데스의 귀족파의 충돌은 투표를 통해 투퀴디데스가 도편 추방되면서 페리클레스의 승리로 마무리됩니다. 그리고 페리클레스의 시대가 열리죠.

4. 절정과 몰락

“자긍심을 가진 사람에게는 희망을 품고 용감하게 싸우다가 자신도 모르게 죽는 것보다, 자신의 비겁함으로 말미암아 굴욕을 당하는 것이 더 고통스러운 법입니다.”
— 투퀴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 페리클레스 연설(43–6)

화무십일홍, 모든 것엔 끝이 있나 봅니다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정세는 계속 악화되고 있었습니다. 스파르타는 성장하는 아테네를 견제했고 아테네가 이끄는 델리안 동맹의 결속력은 계속 약화되어만 갔습니다. 업친데 덥친 격으로 아테네 시민들의 욕심은 끝나지 않아 더 많은 영토를 정벌하고 더 많은 부를 축적하고 싶어했죠.

이러한 상황에서 페리클레스는 슬기롭게 상황에 대처합니다. 먼저 50세 이상의 시민을 뽑아 사절단을 보내 아시아와 이오니아 도리아 국가의 연합 회의를 제안합니다. 여기서 성과가 별로 없자 그는 아테네의 재해권 강화를 추진하면서 스파르타에 대항할 것을 주장합니다. 그리고 반란국 정벌에 나서는데 가장 대표적인 전쟁이 사모스 전쟁입니다. 사모스는 밀레토스와의 전쟁을 멈추라는 아테네의 명령을 무시했고 페리클레스는 함대를 이끌고 사모스 섬을 쳐 대승을 거둡니다.

이렇게 그는 필요한 전쟁을 피하지 않았고 필요 없는 전쟁에 욕심을 부리지 않음으로서 아테네를 지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그는 많은 정적들의 공격을 받게 됩니다. 특히 펠로폰네소스 전쟁 초기에 아테네에 역병이 돌면서 많은 사람들이 죽자 시민들은 페리클레스를 비난하기 시작합니다. 역병 때문에 가족과 아들마저 잃은 페리클레스는 결국 그 자신도 병을 얻게 되고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아테네의 몰락이 시작되죠.

5. 평가

“내가 거둔 승리 중에서 절반은 운이 좋아서 얻은 것이오. 또 그 정도의 공은 다른 장군들도 다 세운 것들이오. 그런데 그런 것은 칭찬해 주면서 왜 내가 세운 가장 훌륭하고 위대한 공적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안하는 것이오? 내가 한 일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은 아테네 시민들 중에서 나 때문에 상복을 입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오.”
— 플루타르코스, 페리클레스 중 페리클레스의 마지막 말

플루타르코스는 페리클레스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페르클레스가 세상을 떠나자 아테네 시민들은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그가 죽고나서 수많은 저이가와 웅변가들이 날뛰었지만, 페리클레스만한 인물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교만한 듯하면서도 그처럼 온유한 사람은 없었고, 허세가 있는 듯하지만 사실은 진실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가 살아 있을 동안 사람들은 그의 정치를 전제니, 독재니 하면서 비난했지만 그는 진정으로 나라를 위해 애썼던 사람이었다는 것이 그 이후의 부정과 부패로 증명되었다.”

투퀴디데스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하여 이름은 민주주의지만 실제 권력은 제일인자(페리클레스)의 손에 있었다. 그러나 페리클레스의 후계자들은 수준이 그만그만했으며, 서로 일인자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국가 정책조차 민중의 기분에 맡겼다. 그런 태도는 제국을 다스려야 하는 큰 도시에서는 여러 가지 실수를 유발하게 마련인데, 대표적인 예가 시켈리아 원정이다.”

페리클레스의 업적은 그가 죽은 후에 더 빛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의 후손은 페리클레스가 지켰던 아테네를 몰락의 길로 내몰았으니까요. 페리클레스 집권 당시 아테네는 전쟁의 상처로 상복을 입을 일이 없었지만 그 이후 전쟁의 과정에서 아테네의 시민들의 눈에는 전쟁으로 인한 상실의 눈물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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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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