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아곤
6 min readSep 11, 2018

--

약 한달 쯤 전에 오랜만에 정열이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정열이와는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알고 지내면서 이따금씩 연락을 주고 받았지만 서로 취직을 하고 시간이 없어지면서 꽤나 오랫동안 소식을 듣지 못했던 터였습니다. 반갑게 카톡을 나누니 천호에서 오랜만에 보면서 저녁이나 먹자는 이야기가 나와서 가벼운 마음으로 천호에서 정열이와 만나 삼겹살을 먹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정열이가 저에게 자전거를 살 생각이 있으냐고 물어보는 것이었습니다.

어찌보면 뜬금 없는 제안이었습니다. 정열이는 자신이 나가는 자전거 동호회 회원이 로드 바이크를 싸게 내놨는데 제가 사면 좋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전거 가격은 25만원인데 제가 만약 타지 않으려면 중고 나라에 당장 올려도 40만원에 팔릴 것이라며 이런 기회는 진짜 다시 없다고 저를 설득했습니다. 거의 보험 사기단 수준으로 너무 솔깃한 제안이었습니다. 삼겹살을 씹으면서 곰곰히 생각하다가 그 자리에서 바로 사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후로 일주일이 지난 후 저는 로드 바이크를 처음 타보게 되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충동 구매를 한 건 아니었습니다. 작년 10월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오고 집에서 출퇴근을 하게 되면서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 집은 강변에 있고 직장은 녹사평 쪽이라 강변에 있는 자전거 도로를 쭉 가다가 반표대교에서 올라가면 바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녹사평에서 강변까지는 지하철로 30분 이상 걸리고 걸어가는 시간과 지하철을 기다리는 시간을 포함하면 못해도 50분은 걸립니다. 자전거를 타고 가면 대략 한 시간이면 도착하는 거리니까 생각해 보면 시간적으로 거의 차이가 없습니다. 이제까지 이렇게 생각만 하고 자전거를 사지 못해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로 자전거를 살 기회가 온 것입니다.

처음 자전거를 타고 출근을 할 때는 걱정도 있었습니다. ‘길이 익숙하지 않아 해매면 어떡하지?’ ‘운동 한 지도 꽤 오래 됐는데 중간에 퍼지면?’ ‘아니면 자전거가 퍼지면?’…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들었는데 막상 가보니 아침 시간에는 도로도 한산하고 자전거 도로도 매우 잘 정비되어 있어서 씽씽 달려다가 보니 어느 새 목적지에 도착해 있었습니다. 이제는 무더위도 지나서 날씨도 매우 좋고 올해는 하늘도 맑아서 강변을 따라 하늘과 구름을 따라 페달을 밟으면 땀도 별로 나지 않고 미끄러지듯이 달려갈 수 있었습니다. 물론 자전거 도로에서 나와 차들이 있는 도로로 나왔을 때 공사가 있거나 하면 옆에서 휙 지나가는 차때문에 놀라기도 하지만 막상 자전거를 타면 페달을 밟고 나가는 느낌이 좋습니다. 그래서 지난 주부터는 거의 자전거로 출퇴근을 하고 있습니다.

자전거로 출퇴근을 할 때 가장 힘든 건 아침의 귀찮음을 뿌리치는 것입니다. 막 자고 일어나면 딱 5분만이라도 침대에서 조금 더 뭉게고 싶어지는 것처럼 집안 베란다에서 현관문까지 자전거를 옮길 때면 뭔가 몸이 찌뿌둥하게 느껴지곤 합니다. 아침 바람이 차가울 것만 같고 어제 뭉친 근육이 다 풀리지 않은 것처럼 쑤시기도 합니다. 엘레베이터를 내려와 아파트에서 나서서 처음 자전거 페달을 밟을 때까지 찬바람은 몸을 떠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한 두번 페달을 돌리고 몸이 앞으로 나가는 걸 느끼면 그 바람이 더 이상 차갑게만 느껴지지 않습니다. 어느 새 스치는 바람도 익숙해 지고 하늘이 보이기 시작하면 오늘도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 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올해를 돌이켜 보면 이렇듯 우연하게 시작한 일들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그 중 많은 부분을 미디엄에 옮겨 적었고 어떤 건 다 적지 못했습니다. 시작한 것도 많고 하다가 중간에 흐지부지 된 것도 많고 보류해 둔 일도 참 많아 보입니다. 특히 코딩을 하는 시간이 뜸해진 건 참 아쉽습니다. 요즘은 암호학에 관심을 두면서 여기에 바탕이 되는 컴퓨터 공학 분야에 대한 논문을 읽고 있기 때문에 어찌보면 컴퓨터에 대한 공부를 게을리하고 있는 건 아니지만 코딩은 또 완전히 다른 영역이라 다시 해야지 해야지 하면서 차일피일 미루고 있습니다. 또 블록체인과 암호화폐를 접하면서 처음 다뤘던 주제인 법에서도 조금은 멀어졌습니다. 북클럽을 하다 보면 이와 관련된 내용이 나오곤 해서 예전에 읽었던 자료를 상기해 보기도 하지만 요즘은 공청회나 최근 규제 근황을 찾아보고 있지 않습니다. 다른 많은 블록체인 근황처럼 흘러가는 이야기를 나중에 되어서야 듣고 생각이 나면 조금 찾아보는 정도에 그치고 있습니다.

뭐 후회는 없습니다. 어차피 제게 주어진 시간은 한정적이라 제가 하겠다고 마음 먹은 일들만 해도 언제나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요즘 제가 정말 마음을 다 쏟아서 하고자 하는 일은 두가지 입니다. 첫 째는 로어 북클럽 세션 운영이고 둘 째는 꾸준히 글을 쓰는 것입니다. 가능하면 로어의 규모도 키우고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세션도 더 많이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저는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구성원들이 좋은 취미와 배움을 이어갈 수 있는 다양한 활동들이 활성화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현재 체계는 굉장한 의지가 없이는 지속가능한 형태로 취미를 이어나가기 힘든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개인의 보람 이외에 취미를 통해 얻는 가치가 확실하지 않고 취미가 활성화되는 문화가 정착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로어를 통해 이러한 사회적 구조를 변화시킬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세션을 하나하나 진행하면서 느끼는 건 머나먼 어떤 목표에 집중하기 보다는 지금 당장에 최선을 다하는게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정말 로어가 사람들에게 좋은 시간을 선사하고 싶은 거라면 제가 운영하는 북클럽에 참여하는 사람에게 후회없는 시간을 제공하는게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사전에 다룰 내용을 면밀히 살펴보고 소통 채널을 통해 의견을 수렴하며 세션에서 참여자의 이야기를 잘 들어서 좋은 대화를 이어나가야 합니다. 이렇게 좋은 대화가 차곡차곡 쌓으면 페달을 밟아 앞으로 나아가는 자전거처럼 언젠가는 목적지에 다다르지 않을까 믿고 있습니다.

그러다 체인이 엉켜서 발라당 엎어질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시작한 많은 일들을 끝내지 못한 것처럼 아직 완벽을 논하기에는 부족한 자신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타인에게는 태연한 척 숨길 수 있겠지만 저는 알고 있습니다. 매 순간순간 흔들리고 있는 것을. 그럴 때면 글을 씁니다. 두려움이 엄습해서 자신이 하는 일에 회의가 들 때, 내가 하는 일이 무의미 해서 외롭다고 느낄 때, 열심히 하는데 아직도 이룬 것이 없어 조바심이 들 때, 저는 글을 씁니다. 다른 건 다 사라져도 제가 적은 글귀가 누군가에게 닿는 다면 저는 그만큼 세상에 남을 것입니다.

글을 쓰면서 제 길을 비춰준 이들을 생각해 봅니다. 정열이처럼 우연의 바퀴를 굴려준 모든 사람들을… 이 기회를 통해 저는 오랜 친구인 정열이를 다시 만났고 자전거라는 새로운 취미를 가지게 됐습니다. 그래서 퇴근 길에 조금씩 기우는 석양을 향해 바람을 가르며 싱긋이 웃어 보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