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은 토마스 피케티의 자본과 이데올로기 8장과 9장의 내용을 요약 정리한 내용입니다. 괄호 안에 표시된 페이지는 영어 원본을 기준으로 작성된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1. 배경 — 제국주의 유럽 국가의 출현
15세기 이후 유럽에서는 국가 상비군을 중심으로 한 제국이 탄생하기 시작합니다. 영국, 프랑스, 스페인, 포루투갈, 독일까지 각 지역을 정벌한 왕이 출현하면서 서로의 힘겨루기가 시작되죠. 이들은 15세기와 16세기를 걸친 이탈리아 전쟁에 이어 종교 전쟁인 30년 전쟁을 겪으면서 군세를 확장합니다. 따라서 모든 국가는 군세를 확장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쳐해졌는데 이러한 군비 확장은 훗날 유럽이 전 세계에 식민지를 설립하는데 큰 원동력으로 작용합니다.
18세기를 지나 19세기의 혁명의 시대가 도래했지만 국가간 경쟁은 변함이 없었고 군세는 지속적으로 확장합니다. 이러한 중앙 집권이 강성하면서 기존의 3분리 체제에서 유지되었던 지방 호족 세력의 힘은 점점 약화됩니다. 토마스 피케티는 유럽의 국가별 세금 징수 현황을 통해 중앙 집권의 강화를 설명합니다. 1700년 600에서 900톤에 달하던 은의 징수량은 50년 사이 200톤이 증가하고 다시 30년이 지난 1780년에는 1900톤까지 증가합니다. (p.774–775) 또한 전쟁에 의한 국가 부채도 비약적으로 상승하는데 가장 대표적인 예가 나폴레옹과 영국 간의 워털루 전쟁입니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개입된 것으로도 유명한 이 전쟁에서 영국은 당시 국가 총 GDP의 2배에 달하는 금액을 채권으로 발행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발생한 금융업의 발달과 군사력의 상승은 훗날 유럽이 세계를 재패하는 토대가 되기도 합니다.
유럽에서 중앙 집권이 상한가를 올리고 있을 무렵, 아시아에서는 나름 평화로운 제국이 존재했습니다. 아시아의 국가들은 파편화된 유럽 대륙에 비하면 내부의 체계와 질서를 유지한 통일 국가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조그마한 유럽의 열강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게 됩니다. 토마스 피케티는 세금으로 책정할 수 있는 국력의 비교로 나라별 상황을 설명하는데 본문에서는 중국, 인도, 그리고 일본의 예시를 비교해보도록 하겠습니다.
2. 중국
아편전쟁이 일어난 때인 1839년 까지만 해도 청나라의 황제였던 도광제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당시 무역 상황만 보더라도 영국이 아편을 팔아야 했을 만큼 중국의 비단을 비롯한 제품은 선진 문물에 속해 있었고 국력도 높은 수준을 유지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1842년 전쟁이 끝난 후 최초의 “불평등 조약"이 조인되었을 때 중국은 충격을 금치 못했습니다. 막상 까보니까 중국의 청나라는 크기에 비해 안은 부실한 공갈빵과 같은 느낌이었으니까요.
토마스 피케티는 국력을 조세력과 비견하여 설명합니다. 예를 들어 국가 GDP의 1% 수준을 조세로 걷는 국가는 국민 생활의 1%를 관여할 힘 밖에 가질 수 없습니다. 반면에 국민 생산력의 10%를 조세로 걷는 국가는 국민 생활의 10%에 관여합니다. (p.781) 청나라와 영국을 비교할 때 중요한 부분이 바로 세금의 비율이었습니다. 피케티에 따르면 1850년 영국이 걷는 조세의 비율은 국민 GDP의 20%에 달했습니다. (p.779) 영국은 이러한 세금으로 군대도 구축하고 전쟁 준비를 했습니다. 반면에 중국은 거대한 국가에 비해 중앙 정부의 조세 비율이 1~3% 정도에 그쳤습니다. (p.822) 실제로 중국은 만주에서 시작한 군벌 세력에 의해 지방 분권화된 통치 제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권력은 문벌 귀족 중심의 중앙 엘리트, 토지 소유자, 그리고 지방 군벌로 나뉘어 있었죠. 그래서 실제로 국력으로만 따지자면 중국이 영국의 상대가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아편 전쟁에서 패배한 중국은 이후 반란을 겪으면서 쇠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아편 전쟁으로 인한 불평등 조약 이후 유럽 각국의 열강과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게 되면서 빚이 늘게 되죠. 청나라 정부는 빚을 갚기 위해 세금을 올립니다. 하지만 여기서 올린 세금은 유럽 열강이 올린 세금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걷어서 남한테 다 주고 국민에게 돌아가는 인프라적인 혜택이 전혀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중국에는 태평천국 운동을 비롯한 민란이 지속적으로 발생합니다. 민란과 외국 부채를 해결하기 위해 청나라는 세금을 더 올리는 악순환이 반복되죠. 반란에 군벌 귀족이 합세하면서 결국 청나라는 멸망하고 말죠. 그리고 마침내 1911년 중국에는 혁명 정부가 수립됩니다.
하지만 혁명 정부는 별로 혁신적인 정책을 내놓지 못합니다. 특히 청나라 때부터 이어져 온 문벌 관료, 군벌 관료, 토지 소유자 중심의 소유권 문제를 전혀 해소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회 불평등은 지속되고 혼란했던 세계 1차 대전과 2차 대전을 거쳐 중국에 공산당 중심의 정부가 세워지는 빌미를 제공합니다.
3. 인도
인도하면 가장 유명한 게 (카레…는 아니고) 카스트 제도입니다. 인도는 아직까지도 전근대적인 계급 제도의 유산인 카스트 제도를 유지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선진국이 되지 못한다는 비난도 많죠. 그런데 피케티에 따르면 인도의 카스트 제도는 인도가 만든 전근대적인 유산이 아닙니다. 실제로는 영국이 뿌리 내린 식민주의의 잔재입니다.
인도가 영국에게 점령되기 전에 신분제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인도는 나름대로 다문화적 유산을 유지하면서 종교와 신분간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인도는 중국보다도 훨씬 지방 간의 편차가 컸기 때문에 각 지역의 특색에 따라 체제가 유지되고 있었죠. 그런데 영국 식민 정책하에 통치의 편의성을 위해 “힌두"라는 정체성과 신분으로서의 “카스트 제도"가 발달했습니다.(p.662~663) 이전에 힌두는 다신을 섬기는 다양한 종교의 느슨한 연결체로서 존재했고 카스트는 자티스라고 하는 수 천가지의 직업 구분에 불과했습니다. 이걸 영국인이 4개의 계급 제도(바르나스)로 고착화 시키고 특히 “브라만" 계급에게 공식 직책을 부여하기 시작하면서 계급제로서의 카스트 제도가 정착했습니다.(p.702, 709)
독립 이후 인도는 카스트 제도의 신분제 철폐를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정치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카스트 제도의 폐습은 많이 사라진 것이 사실입니다. 피케티는 카스트 제도의 수드라(최하위 계급)과 미국 사회에서의 흑인이 가지는 지위를 비교하는데 비교적 수드라의 지위가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p.743) 다만 인도 사회가 워낙 빈곤하고 교육과 의료같은 사회 인프라적 시스템이 제공되지 않아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또한 토지 배분이나 재산 분배를 통한 소득 평준화를 실현했던 건 아니라는 점이 가장 큰 불평등의 축으로 남아 있습니다.(p.750)
따라서 독립 이후 인도의 모든 정책을 옹호할 수는 없겠지만 불평등 해소를 위한 노력을 기울였고 또 실제로 불평등을 해소한 부분이 있습니다. 다만 앞으로 정치적인 할당제를 넘어 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한 부분도 있습니다.(p.755) 그러나 카스트 제도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영국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그 어떤 이해도 불가능할 것입니다.
4. 일본
일본의 메이지 유신은 세계적으로 가장 급격하고 성공적인 근대화의 사례로 이해하는 시각이 지배적입니다. 아시아의 모든 나라가 열강의 식민지화에 맥을 못 추릴 때 일본은 빠른 산업화를 기반으로 확장 전략을 취했으니까요. 실제로 이 시기에 일본은 빠르게 중앙 집권화된 모습을 보이면서 증세를 결정했고 특히 교육에 막대한 투자를 하면서 산업화에 성공했습니다. (p.812) 그리고 서구 열강에 맞서는 아시아의 유일한 희망이라는 테제로 한국과 중국으로 진출했습니다.
일본 국가주의자의 시각에서 바라보았을 때 가장 치욕적인 순간은 1919년 베르사유 조약에 인종 평등, 특히 일본인과 서구인의 평등에 대한 내용이 담기지 않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p.814) 그래서 이들이 주창했던 황국신민주의는 일본인의 시각에서 보면 타당한 부분이 존재합니다. 다만 중국인이나 한국인의 시각에서 보았을 때 일본의 정벌은 침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그 주체가 유럽 열강에서 일본으로 바뀌었을 뿐이었죠. (p.816)
피케티는 일본의 사례가 사회경제적 발전을 이루는 최선의 방법이었다고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메이지 유신에서 일본이 행했던 공공 인프라와 교육 투자는 실질적인 성과를 얻었다고 평가합니다. 또한 2차 대전 이후의 일본을 보아도 최하위 계층으로 분류되는 부락민의 비율이 전체 인구의 5%를 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았을 때 그 성과를 간과할 수는 없는게 사실입니다.
5. 결론
피케티의 분석을 보면서 구한말 대한민국의 모습은 어땠을까에 대한 궁금증이 더욱 커졌습니다. 현재 대한민국이 가지는 사회 구조적 모습에서 식민지의 영향은 부정할 수 없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조선 말 국력은 객관적으로 어느 정도 였으며 어떤 사회 구조적인 장치를 가지고 있었는지 동학 농민 운동과 태평천국 운동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무엇인지 그리고 식민지화 이후의 모습은 어떻게 바뀌었는지 살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