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황제, 페르티낙스

참고: 에드워드 기번, 로마제국 쇠망사(이종인 번역)

1. 배경

로마의 마지막 현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아들 콤모두스는 유명한 개망나니 였습니다. 19세에 황제가 된 콤모두스는 암살 시도를 겪은 후 불신에 사로잡혀 사소한 트집을 가지고도 측근을 서슴없이 죽였습니다. 또한 “헤라클레스 놀이”에 빠져 자신의 무력을 과시하기 위해 투사와의 결투에서 그들을 마구 죽였으며 향락에 빠져 남녀 300명을 선발해 하렘을 만들고 국사를 등한시했습니다. 결국 그는 가장 측근이었던 근위대장과 시종장 그리고 애첩 마르시아에 의해 살해당합니다.

황제를 살해한 음모자들은 새로운 황제를 물색합니다. 로마인들에게 신임을 받아 그들의 죄를 공로로 사면해줄 그런 황제를 찾고 있었죠. 이 때 로마의 시장이었던 페르티낙스가 새로운 황제로 당첨됩니다. 그는 총독 시절에 성공적인 통치를 펼쳤기 때문에 명망이 있는 인물이었으니까요. 근위대장과 시종장은 페르티낙스를 황제로 추대하기 위해 밤에 그의 집에 찾아가는데 페르티낙스는 처음 그들을 보자 그가 콤모두스에게 사형을 당할 것이라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황제의 자리를 제안받자 심사숙고하게 되죠. 황제라는 자리가 얼마나 위험한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오랜 숙고 끝에 그는 황제의 자리를 수락하게 됩니다.

2. 황제가 되기까지

126년에 태어난 페르티낙스는 뛰어난 가문 출신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선조는 노예에서 자유민으로 해방된 이력이 있었으니까요. 곤궁했던 그가 성공을 위해 택할 수 있는 길은 아마 군인이 되는 것 뿐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브리타니아(지금의 영국), 다시아(지금의 헝가리와 로마니아), 그리고 다뉴브(지금의 오스트리아) 지방에서 근무합니다. 이는 모두 로마의 최전선 변방 지역이었다는 걸 감안하면 그는 군인으로서 야전 경험이 매우 높았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습니다.

많은 공적을 이뤄 로마 원로원으로 진출하지만 중앙의 견제를 받았던 그는 180년 당시 근위대장이었던 섹스투스 페레니스에 의해 정계에서 축출되고 맙니다. 하지만 그는 능력이 뛰었기 때문에 이후 브리타니아와 아프리카에서 총독 역할을 수행하게 되죠. 그가 총독인 시절, 콤모두스 황제 아래 로마의 군인은 점점 타락해가고 있었습니다. 군인 정신이 실추되어 나약하고 안일한 모습으로 바뀌어가고 있었죠. 페르티낙스는 훈련을 강화하고 군인 정신을 함양하는 정책을 펼치고자 합니다. 하지만 군단(레기온)이 거부하면서 그의 정책은 수포로 돌아갑니다. 이런 와중에 그는 로마 시장이 되어 중앙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었습니다.

3. 황제로서의 3개월, 그리고 피살

193년 콤모두스가 사망하고 페르티낙스가 즉위했다고 발표했을 때 원로원과 시민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콤모두스가 또 무슨 연극을 벌이고 있는 건 아닐지 두려워하는 사람도 많았죠. 그런데 곧 의아함은 환호성으로 바뀝니다. 페르티낙스가 즉위하여 콤모두스의 억압적인 과세를 철폐하고 부당한 국고 지출을 거부했으니까요. 정직과 정의를 우선시 여겼던 페르티낙스는 콤모두스의 사치때문에 바닥이 난 재정 상태에서 방탕한 생활을 철폐하고 무너진 기강을 다시 세우는 작업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페르티낙스의 즉위에 불만을 가진 세력이 있었습니다. 바로 로마의 황실 군대인 근위대였죠. 근위대의 입장에서 콤모두스는 폭력적이고 비위 맞추기 어렵기는 했어도 그들에게 돈도 잘 주고 편안하게 대해주는 황제였습니다. 능력이 뛰어나진 않아도 일을 안 시키니까 편안히 꿀을 빨 수 있는 환경이었죠.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야전에서 굴러온 놈이 튀어나와서 기강을 바로 세우고 지금까지의 사치를 금지하도록 조치를 취하니까 일부 근위대는 불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193년 3월, 근위대 병영에서 대규모 소요 사태가 벌어졌고 200~300명의 병사가 황궁으로 쳐들어왔습니다.

반란군과 맞선 페르티낙스는 당당했습니다. 황제의 위엄을 가지고 그들 앞에 걸어가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충성심과 신성함을 강조했죠. 병사들은 오히려 말이 없어졌습니다. 황제의 위엄에 압도된 것이었죠. 하지만 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이미 그들은 돌이킬 수 없는 행동을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을요. 그들은 이미 반란군이 되어 있었고 이곳까지 온 이상 그들이 사면 받을 수 있는 방법은 없었으니까요. 모두 주춤하고 있을 때 한 바바리안 병사가 페르티낙스에게 일격을 가합니다. 그러자 모든 병사들이 너나 할 것 없이 황제를 공격합니다. 그렇게 페르티낙스는 허망하게 사망합니다. 그가 황제가 된 지 겨우 3개월 만에 일어난 일이었죠.

4. 페르티낙스는 무엇을 했어야 할까?

“군주는 여우와 사자를 겸비해야 한다. 사자는 스스로 함정을 막을 수 없고, 여우는 이리를 막을 수 없다. 따라서 함정의 단서를 알기 위해서는 여우가 되고, 이리를 도망가게 하기 위해서는 사자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 마키아벨리, 군주론 XVIII

훗날 대부분의 역사가는 페르티낙스를 정의롭고 훌륭한 인물로 평가합니다. 이는 그의 능력 자체에 대한 평가도 있겠지만 그가 죽은 이후 로마가 겪어야 했던 어처구니 없는 상황들에 대한 안타까움도 섞여 있을 것입니다. 페르티낙스가 죽자 그의 장인이자 로마 시장이었던 술피키아누스는 근위대의 만행에 침묵해버립니다. 거기서 한 술 더 나아가 근위대에게 5천 드라크마를 제안하며 황제 자리를 사려고 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원로원 의원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는 병사들에게 6250 드라크마를 제안하고 경매를 통해 황제의 자리를 구매합니다. 이 사건은 황제라는 직위의 위신이 얼마나 하찮게 떨어졌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페르티낙스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처럼 겸손하고 정의를 사랑하며 인간적인 면모가 돋보였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아루렐리우스는 양자로서 황제의 정통성을 인정받은데 비해 페르티낙스는 군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황제가 되었기에 그가 했던 행동은 모두 미움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죠. 그래서 마키아벨리는 페르티낙스의 행동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서 알아야할 점은 나쁜일 만큼이나 선한일도 미움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전에 이야기 했던 것처럼 국가를 유지하고자 하는 군주는 선하지 않은 일을 해야만 할 때가 많다. 당신이 지지를 받아야만 하는 국민, 군대, 그리고 귀족과 같은 특정 계급이 부패했을 때 당신은 그들의 수준에 맞춰 그들을 만족시켜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결한 행위는 당신을 헤치기만 할 것이다.” — 마키아벨리 군주, XIX

페르티낙스는 어떤 방법이 되었든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근위대를 자신의 편으로 포섭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부패한 군인이 원하는 건 정의도 신의도 아니었기에 너무 바른 사람이었던 페르티낙스는 죽음을 맞이할 수 밖에 없었죠. 페르티낙스의 결정이 틀렸다고 단정 짓기는 어렵습니다. 로마가 몰락하고 있는 가장 근원적인 원인 중 하나는 군인 정신의 타락이었고 그는 이를 바로 잡으려 했으니까요. 하지만 좀 더 장기적인 호흡으로 하나하나 처리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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