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치 가문과 마키아벨리

1. 15세기 유럽의 정치적 상황과 메디치 가문의 성장

15세기는 격동의 시대였습니다. 흑사병의 공포가 유럽 전역을 휩쓴 이후 사회는 이전과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으니까요. 교회와 봉건 영주로 구성된 종교적/정치적 질서가 무너지면서 새로운 세력이 등장했습니다. 이탈리아에서는 교황청이 분열되어 입지가 줄어든 틈을 이용해 중개 무역과 금융업에 기반을 둔 도시 가문이 성장했고 영국, 프랑스, 독일, 스페인과 같은 국가에서는 통일을 위한 전쟁이 한창이었습니다.

초기에만 해도 메디치 가문은 이탈리아 피렌체 지방의 평범한 중산층 가문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중개 무역의 중심지였던 피렌체의 특성을 잘 이용했던 메디치 가문의 수장, 조반니 데 메디치는 탁월한 사업 수완을 발휘해 금융업으로 거대한 부를 축적합니다. 이후 메디치 가문은 국부로 불리는 코시모 메디치와 위대한 자, 로렌초 메디치를 거치면서 전성기를 맞이합니다.

2. 메디치 가문과 르네상스

뭔가 목욕탕에 잘 어울릴 것 같은 그림,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입니다

메디치 가문은 사업적 수완 만큼이나 외교적 수완이 매우 뛰어났습니다. 코시모 메디치는 가문의 수장으로서 밀라노, 페라리와 같은 도시 국가에 사절단을 보내 관계를 돈독히 다집니다. 또한 교황청과 굉장히 밀접한 관계를 맺습니다. 비록 분열과 권력 투쟁으로 인해 힘이 약해졌지만 당시 교황청은 아직도 유럽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1431년 개최된 바젤 공의회에서 교황청은 공의회의 위치를 이탈리아 페라리로 옮기는 걸 결정했는데 코시모는 로비를 통해 공의회의 위치를 피렌체로 옮기는데 성공합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제네바처럼 유엔의 핵심 기구를 피렌체로 옮겨온 것이지요. 이를 통해 유럽에서 피렌체가 지닌 상징적 의미가 올라갔고 공의회 개최와 관련된 여행업으로 상당한 경제적 혜택도 누리게됩니다.

메디치 가문이라고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건 예술과 학문입니다. 그들이 후원한 이탈리아의 예술가로 인해 르네상스 시대가 완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니까요. 보티첼리,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파엘로는 모두 로렌초 메디치의 비호아래 예술인으로서 꽃 피울 수 있었습니다. 또한 메디치 가문은 동로마제국이 멸망하면서 소실되었던 그리스/로마의 고서를 수집했고 지식인과 교류했습니다. 그리고 지식인을 위한 플라톤 아카데미를 세웠습니다. 이곳에서 연구된 종교, 철학, 문학은 훗날 종교 개혁에 토대가 됩니다.

여기서 특이한 점은 메디치 가문의 전성기에 두 인물이 피렌체에서 공식적인 직책을 맡은 적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피렌체는 공화정 국가로 시뇨리아라는 의회 기구를 두고 있었습니다.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의 실질적인 지배 가문으로서 정치적, 외교적, 경제적, 문화적 영향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공식적인 타이틀을 소유하지 않음으로서 조세와 운영은 의회인 시뇨리아에서 처리하도록 한 것입니다. 말그대로 “비선 실세”였죠. 로렌초는 자신의 아들에게 “너는 피렌체의 일개 시민에 불과하다는 걸 잊지 말라"는 말을 자주했다고 합니다. 아마 변덕도 심하고 시기와 질투가 많은 피렌체에서 공직을 하는 대신 한 발자국 떨어져서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걸 선택한 걸지도 모릅니다.

3. 이탈리아 전쟁과 피렌체의 몰락

전성기 시절에도 메디치 가문은 끈임없이 내부적, 외부적 요인에 의해 위협을 받았습니다. 코시모 메디치는 가문의 수장이 되고 얼마 되지 않아 피렌체에서 추방 당했고 로렌초도 교황청과 결탁한 귀족 세력이 암살을 시도하면서 예배 도중에 동생을 잃었습니다. 그래도 뛰어난 수완을 발휘했던 코시모와 로렌초 메디치가 통치할 시절에는 버틸 수 있었지만 불행자 피에트로 메디치가 가문을 이끌게 되면서 그 위협이 목전까지 다가오게 됩니다.

피렌체의 몰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변 국가의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100년 전쟁을 마친 영국과 프랑스는 패권 국가로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프랑스의 샤를 8세는 전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국가 상비군을 조직했죠. 스페인의 페르난드 왕은 이사벨라 여왕과 결합하여 스페인을 통일하고 무어족을 물리치면서 해군을 양성하고 있었습니다. 독일마저도 오랜 분열의 역사를 뒤로하고 막스밀리언 1세 아래 신성 로마 제국으로 거듭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전제 왕정의 패권 국가들은 서로를 견제하기 위해 상비군을 조직하고 국력을 기르고 있었죠. 아직 도시 국가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이탈리아는 풍전등화의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전쟁의 시작은 교황의 욕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492년 교황이 된 알렌산더 6세는 야망이 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탈리아와 스페인에 기반을 둔 보르지아 가문의 사람이었는데 이탈리아를 굴복시키고 자신의 아들인 카이사르 보르지아의 통치 아래에 두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1489년에 교황청에서 파문당한 나폴리를 시작으로 이탈리아 정벌을 계획합니다. 알렉산더 6세는 강력한 상비군을 조직하고 있었던 샤를 8세에게 나폴리 정벌을 명령합니다. 안그래도 전쟁을 통해 국력 확장을 꾀하고 있던 샤를 8세에게는 너무나 반가운 소식이었죠. 그는 나폴리 원정을 결심하고 1494년에 2만 5천 명의 프랑스 군과 8천 명의 스위스 용병을 동원해 이탈리아로 향합니다.

피렌체는 프랑스 군이 원정을 떠나는 길목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피에트로 메디치는 피렌체를 대표해서 프랑스 왕 샤를 8세를 만나 협상을 벌이게 됩니다. 굳이 피렌체와 전쟁을 해서 병력을 낭비할 필요가 없었던 샤를 8세는 피사를 비롯한 요세 도시의 소유권을 대가로 약탈 없이 영토를 지나갈 것을 약속합니다.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이길 자신이 없었던 피에트로는 조건에 수긍하죠. 하지만 이로 인해 피렌체 국민들은 메디치 가문을 미워하기 시작합니다. 야만족에게 나라를 팔아넘겼다고 말이죠. 피렌체의 시뇨리아가 소집되어 메디치가의 영구 추방 법안을 통과시키고 피에트로의 목에는 현상금까지 붙게 됩니다. 그렇게 메디치 가문은 쫓겨나듯이 이탈리아를 떠나게 되었고 코시모와 로렌초가 쌓아올린 부와 문화적 유산은 소실되어 버렸죠.

4. 마키아벨리와 메디치 가문의 악연

니콜로 마키아벨리

마키아벨리는 피렌체에서 메디치 가문이 쫓겨난 이후인 1498년 29세의 나이로, 피렌체 공화국에서 외교 업무를 담당하는 직책을 맡습니다. 이후 프랑스와 독일에 파견되어 그들을 관찰했죠. 샤를 8세의 원정은 앞으로 이탈리아에서 벌어질 전쟁의 서막에 불과했습니다. 새로이 교황으로 오른 율리우스 2세와 함께 절대 왕정을 확립하고 있는 모든 국가가 이탈리아 점령에 군침을 흘리고 있었으니까요. 마키아벨리는 서유럽에서 지내면서 변화하는 상황을 직접 목격했고 피렌체에 경고를 보내고 싶어 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을 토대로 훗날 군주론을 집필하게 됩니다.

메디치 가문이 쫓겨난 후 피렌체는 한 동안 무정부 상태에 가까운 혼란을 겪다가 결국 피에로 소데리니가 종신 집권하는 체제로 전환됩니다. 피에로 소데리니는 선량하고 존경받는 인물이었으나 힘이나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무질서한 내부 세력을 정리하고 외교적인 수완으로 강국들 사이에서 피렌체를 전쟁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들 역량은 없었으니까요.

1508년 이탈리아에서는 다시 한번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교황 율리우스 2세는 프랑스를 몰아낼 생각으로 스페인, 독일과 손을 잡고 베네치아에 전쟁을 선포합니다. 교황은 길목에 있었던 피렌체 공화국에 소데리니를 해임하고 메디치가의 피렌체 복귀를 허락할 것을 조건으로 평화 조약을 제안합니다. 피렌체 시뇨리아는 이를 거절하고 마키아벨리에게 시민군을 주어 피렌체에서 16km 떨어진 프라토를 방어하도록 합니다. 스페인군은 피렌체 시민군을 가볍게 물리치고 프라토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리죠. 이를 계기로 1512년 메디치 가문은 다시 피렌체로 돌아오게 됩니다.

5. 부서져버린 정치의 꿈, 책으로 펼치다

로렌초 메디치

1513년 마키아벨리는 반 메디치 정부 인사와 연류되어 체포됩니다. 그는 투옥되어 고문까지 당하였으나 금방 풀려나게 됩니다. 돌아온 메디치 가문을 이끌게 된 로렌초 메디치는 자신과 가문에 고통을 안겨준 피렌체인들에 대해 혐오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죠. 그의 과도한 원정 결정은 피렌체 시민들의 분노슬 샀고 그의 목숨을 노리는 음모가 자주 일어나면서 처형이 끊이지 않는 악순환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키아벨리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피렌체를 다시 한번 일으킬 꿈을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유배와 고문의 상황에서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정치적 경험과 식견을 담아 1513년 군주론을 집필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소책자의 형태로 로렌초 메디치에게 헌정하죠. 하지만 로렌초는 마키아벨리의 책을 읽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를 다시 부르는 일도 없었죠.

이후 마키아벨리는 정치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지식인들과 교류합니다. 오리트 오리첼라리라고 불린 이 모임에서 참여자들은 공화 정체의 운명에 대해 끈임없이 토론했다고 합니다. 오리첼라리 멤버 중 대부분은 복권한 메디치의 전제적 권력에 반대했습니다. 그 중 일부는 1522년 대주교인 줄리오 메디치의 암살을 기도하기도 했죠. 마키아벨리는 직접적으로 음모에 가담하지 않았다고 하나 훗날 그의 저서에는 그들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마키아벨리의 로마사 논고는 모임을 주도했던 루첼라이와 1522년 음모자 중 한 사람인 부온델몬티에게 헌정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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